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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생준비의 정석

어떤 중소기업의 회생신청 전야

학사장교 출신 기업인 하민씨는 고통스러운 기업회생절차를 거치는 동안 일지 형식으로 기록을 남겼다. 물론 누구나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위주로 사실관계를 재구성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정기업(인)에 관한 기록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지만, ‘기업회생절차’에 관한 야전교본과 같은 시사점이 있을 것이다.




 

최고경영자의 실제 경험을 기록한 일지를 세차례에 걸쳐 1)회생신청 전야, 2)회생개시절차 신청~회생계획안 인가, 3)M&A 추진~회생절차 졸업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는 것은 회생절차의 일반적 절차와 주의할 점을 구체적으로 짚어보는 의미가 있다.

 

한 회사의 대표이사로서 하씨는 기업회생절차 신청을 한달 정도 앞둔 시점에서 경영일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일지의 초기에는 여러 차례 “막판까지 좀더 버티었다면 회생절차를 밟지 않고 기업을 복원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독백을 남겼다. 실제로 기업회생절차가 개시된 이후에 방문한 모은행 지점장은 “회생신청을 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었다”고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상황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실제로 이뤄졌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거꾸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최종부도되면서 채권자와 직원들이 아귀다툼을 벌이거나 회사가 공중분해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연출될 수도 있다.

 

한 기업의 존망을 책임진 최고경영자가 그런 예측 불가능한 도박을 경영전략으로 채택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하 대표도 중소기업진흥공단에서 대출이 거부됐다가 선순위 대출신청기업이 탈락하면서 회생신청 직후에 대출승인이 이뤄졌다고 연락을 받았지만, 이런 요행을 위기극복의 상수로 두고 최종부도 당일까지 버틸 수는 없다. 오히려 예측 가능한 경로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범상한(?) 경영자가 채택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도이자, 고통스럽지만 신의성실의 원칙에 충실한 기업인의 합리적 선택일 것이다.

 

“기업회생절차를 진행하는 대표이사는 처음부터 M&A를 늘 염두에 두고 회생절차를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사방이 막히면 열린 하늘을 보라>, 30쪽)

 

이 대목은 저자가 기업회생절차 신청에 앞서 통상적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재정적 파탄’이라는 근본적 원인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차분하게 기업회생절차에 대비해야 한다는 자신의 경험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M&A를 강조한 것은 창업주 및 최고경영자가 기업을 존속하기 위해 노력하는데서 ‘소유지배권’과 ‘경영권’을 지상의 가치로 여겨는 경향에 대한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




 

<기업회생 이론 및 실무>(홍인섭)에서는 M&A는 진행시기에 따라 (1) 회생절차개시 전부터 진행된 M&A, (2) 회생절차개시 후 회생계획인가 전에 진행되는 M&A, (3) 회생계획인가 후에 진행되는 M&A로 분류한다. 서울회생법원 ‘실무준칙 제241호’는 ‘회생절차에서의 M&A’는 ‘회생계획인가 후의 M&A’를 원칙적인 방식으로 규정하고, 회생절차인가 전에 실시된 M&A는 따로 특칙을 두었다.

 

M&A 방식은 제3자 배정 유상증자, 회사채 발행과 병행하는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영업 양수도, 자산매각, 회사분할, 신회사 설립 등 여러 가지 방식이 있지만, <기업회생 이론 및 실무>에서는 제3자 배정 신주인수 방식과 영업양도 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비교했다.

 

M&A에서 널리 활용되는 ‘3자 배정 신주인수 방식’은 제3자에게 유상증자를 통하여 채무자의 신주를 배정, 발행하는 방식으로서, 회생절차에서는 기존 주식의 감자를 시행할 경우에 주총 특별결의나 채권자보호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고, 채무자의 부채가 자산을 초과하면 관계인집회에서 ‘주주 의결권’이 부인되기 때문에 지배구조 변경이 신속하고 경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반면에 ‘영업양도 방식’은 채무자(기업)의 영업 전부 또는 일부를 인적·물적·영업비밀·노하우 등 조직화된 총체, 즉 ‘통째로’ 제3자에게 이전하는 방식으로 양수인이 양도인과 똑같은 영업자의 지위를 취득하게 된다. 회생절차에 서는 주총 특별결의가 불필요하고 반대주주의 주식매수청구권도 인정되지 않지만, 양도절차가 제3자 배정 신주인수 방식에 비해 복잡하고 양도세ㆍ취득세ㆍ등록세 등이 부과된다. 또한 양도되지 않은 잔존자산의 처분 등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돼 회생절차를 곧바로 종결할 수도 없다.



 

하 대표의 기업회생 일지에 따르면, 회사가 결정적으로 어려워지는 상황이 조성되면 은행 등 외부의 이해관계인 못지 않게 회사경영 정보에 밝은 내부 구성원이 예기치 않은 장애를 조성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의 회사에서도 회생신청을 한달쯤 앞둔 시점에 상무급 임원이 자신이 관리하던 사업본부를 통째로 이탈시키는 악재가 발생했다. 해당 부서의 직원들이 집단사직하고 프로젝트까지 통째로 들고 나간 것이다.

 

또한 회사의 부도가 예견되자 ‘제1호 공장’의 매각과 상환연장을 추진하지만 실패한다. 공장 매각이 성사됐지만 담보금액만큼 상환하면 담보권이 해지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주거래 은행은 기존 대출금의 추가상환을 요구했기 때문에 공장을 팔아도 자금난을 해소하는 효과를 거둘 수 없었던 것이다. 해외 프로젝트 계약이 60억원 이상 있었기 때문에 수출입은행에 손을 내밀었지만, 이른바 ‘모뉴엘사태’로 수출금융은 다루지 않는다는 답신을 받았다.



< 모뉴엘 사태>


로봇청소기 등을 생산하는 가전업체 모뉴엘(MONEUAL)은 2014년 기업은행 등에 수출 환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는데, 이 과정에서 금융사와 무역보험공사 등에서 3조원이 넘는 ‘사기대출’을 받은 것이 드러났다.

 

그런데 최근 법원은 기업은행의 피해액 중에서 220억원을 무역보험공사가 대신 지급하라는 1심판결을 뒤집고 무역보험공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수출채권의 존부를 확인할 증빙서류를 징수하는 것은 은행”이라며 대출심사를 소홀히 하고 거액을 빌려준 것은 기업은행의 책임이라고 보았다.

 

이에 앞서 기업은행은 무역보험공사의 보증서를 담보로 1959만달러(220억원)를 대출해주었기 때문에 보험약관에 보상하라는 취지로 소송을 냈고, 1심 재판부는 허위수출 계약이라도 ‘신용보증사고’라고 보고, 무역보험공사가 기업은행에 22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운송서류(선하증권)와 수출면장의 기재내용이 관세청 전자통관시스템 정보와 일치하는지도 확인하지 않았다”고 은행측을 질타했다. 모뉴엘의 수출채권을 매입하면서 징구한 매입서류와 나머지 서류들에 기재된 문구가 일치하지 않는데도 제대로 따져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은 모뉴엘의 대출신청에 대한 내부검토 끝에 대출금 회수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 대표는 자금난 해소를 위해 긴급하게 타진한 해외수출 금융조차 이런 대형사건으로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서양 속담에서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Misfortunes never come alone)”고 했듯이 회사경영 전반이 ‘머피의 법칙’처럼 꼬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시점에서 기획실장이 처음으로 기업회생에 관해서 명시적으로 언급했다고 한다. 흔히 ‘법정관리’로 불리는 절차에 대한 부정적인 통념 때문에 임원진에서 아무도 발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획실장은 “기업회생신청을 하려면 준비기간이 필요하다”면서 “사장이 결심해야 한다”고 직언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이로부터 8일 후에 하 대표는 법원에 기업회생절차개시에 관한 신청서를 제출했다.  

 

하 대표는 이어 “기획실장이 인터넷에서 찾아준 법무법인 가운데 자료가 잘 정리된 듯한 곳을 방문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면서 “기업회생 신청준비를 하는 동안 회사운영자금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나오면 정말 좋겠다”는 독백을 남겼다. 이는 경영자로서 당연한 바람이지만, 뒤집어 말하면 “회사운영자금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면서도 기업회생 신청준비를 면밀하게 병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역설도 성립한다.




 

실제로 하 대표의 회사는 기업회생 신청을 다급하게 추진하면서 회생절차개시 이후 주거래은행의 지급정지와 같은 암초에 봉착할 뻔한 경우가 반복되고, 평직원들의 이해부족에서 비롯되는 ‘퇴직금 보장요구’에 곤혹을 치르게 된다. 다만 하 대표의 평소 경영이념 및 소신과 기획실장의 직언, 기업회생전문 변호사의 조언 등에 기초해서 ‘비상재정운영’에 돌입한 것은 나중에 시의적절했던 조치로 스스로 거듭 평가하게 된다. 재직중인 직원들의 체불임금 등 급여를 모두 지급하고, 회생절차에 필요한 비용 등을 유사시에 지급정지가 되지 않도록 채무가 없는 은행으로 이체한 것이다.


회사는 이틀 후에 기업회생절차 개시신청을 하게 된다. 하 대표는 직원들의 급여지급은 평소의 생각대로 생계보장이란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했을 뿐만 아니라 “회생절차를 밟아도 직원들의 적극적 협력이 없이는 재기가 어렵다”고 적었다. 긴급 자금집행에서 온정적 발상을 떠나 최고경영자로서 냉정한 판단도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윽고 회사의 ‘1차부도’가 발생했다. 하 대표는 고민 끝에 주거래은행과 원청회사 및 협력사 등 주요고객에 ‘기업회생신청’을 사전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길을 택했다. 이 과정에서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금 선지원’을 타진해 보았지만, 어려워진 기업의 손을 선뜻 잡아주는 흑기사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래도 원청회사와의 협의에서 기존 해외프로젝트를 계속 수행하도록 하겠다는 언질을 받아내는 성과도 있었다. 기업존속에 필수적인 영업의 지속가능성은 회생절차에서 ‘계속기업가치’를 담보하는 핵심적 요소의 하나라는 점에서 하 대표로서는 소중한 협력을 약속받은 셈이다.

 

다음날에 주거래은행에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어음결제를 하라고 독촉하면서 ‘블랙아웃(Black Out)'이 엄습했다. 결국은 ‘최종부도’가 나고 당좌거래가 중지됐다. 하 대표는 이날 법원에 회생절차개시 신청서를 접수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전날 방문했던 해외프로젝트 원청회사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프로젝트의 계속진행을 결정했다는 점인데, 회생신청 전에 직접 만나 소통한 것이 주효한 셈이다. 또 다른 프로젝트는 포기각서를 요구받았지만 개시신청에 대한 회생법원의 결정까지만 유보해달라고 요청해서 동의를 얻어냈다고 한다.

 

(계속 - 회생절차개시 신청~ 개시결정 ~ 회생계획안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