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중소기업 회생의 흑기사들
(계속)
어떤 중소기업이 ‘회생M&A'를 골자로 하는 '변경회생계획'을 법원에서 강제인가를 받은 것은 행운이라기보다는 눈물겨운 노력의 결실이었다. <사방이 막힐 때 열린 하늘을 보라>에서 하 대표의 회사는 2017년 2월22일 기업회생절차를 종결했다. 당시 그의 신분은 대표이사 관리인이 아니라 무보수 CTO(기술책임자)였다. 회생절차개시신청 이후 511일만에 회생M&A 계획안이 법원에서 강제인가(2017.1.24)를 받았고, 유상증자 및 채권변제를 정리해서 나흘 후에 회생절차를 졸업한 것이다.
이에 앞서 하 전대표 회사의 변경회생계획안은 3차관계인집회(계획안 의결)에서 부결됐다. 회생담보권 조에서는 100% 동의를 얻었지만 회생채권자 조에서 57%에 그쳐 2/3에 미달한 것이다. 제1채권자였던 보증회사의 반대가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측은 '미발생구상채무'의 현실화에 대한 이슈를 제기하며 보증회사를 우회적으로 압박하기도 하고, 보증회사 출신으로 알려진 CRO를 통한 설득에 주력하지만 결과적으로 별 효과가 없었다.
하 전대표와 회사측은 보증회사와 카드사 등 금융권 채권자들의 미온적인 태도를 설득하는데 애를 먹다가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회생신청 493일째 되던 날에 하 대표는 "오늘 경제신문을 보니 기업회생절차에 'P플랜'을 도입한다고 한다. 법정관리를 받으면 운영자금 조달이 어려운 점을 보완한 것이라고 하니 회생기업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적었다. 만약 그의 회사에 'P플랜'이 적용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적어도 가부간에 500일이 넘는 시간을 소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는 P플랜이 도입되기 이전이었고 하 전 대표 등은 사실상 낙담하고 있었다. 그런 시점에 법원 실무자로부터 긴급하게 ‘변경회생계획안 가결요건에 관한 특칙’을 전해 듣고 일말의 기대를 걸게 됐다. ‘변경회생계획안 가결요건에 관한 특칙’은 “원래의 회생계획안에 동의한 채권자가 변경회생계획안에 의사표시를 하지 않으면 동의로 간주한다”는 것으로, 회사측은 이 특칙을 활용하여 소극적이거나 모호한 입장의 채권자들이 관계인집회에서 반대를 명시하지 않도록 하여 가결을 유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법무법인이나 매각주간사(회계법인), CRO, 관리위원 중 누구도 발설하지 않았고 법원 실무자의 조언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 회사의 회생에 관한 담당판사의 판단이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낳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회생신청 507일째 되던 날에 개최된 변경회생계획안에 대한 제2차, 제3차 관계인집회에서 결의안이 부결되고 말았다. 하 전 대표는 1년이 넘는 동안 강행된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보고 크게 낙담했다.
그런데 부결 직후에 다시 '흑기사'가 등장했다. 법원 실무자로부터 “만약의 경우에 회사측이 강제인가를 희망했다는 것을 재판부도 알고 있다”고 귀뜸을 해 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주심판사가 대표이사 관리인(예전의 상무)에게 강제인가에 관한 자료를 제출할 것을 통보했다. 금융권 채권단의 반대로 회생M&A 계획은 무산된 줄 알았는데 반전이 남아 있었다.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에서는 관계인집회에서 회생계획안이 부결되면 법원이 회생절차를 폐지하거나 직권으로 회생계획안을 강제인가를 할 수 있는 ‘2개의 선택지’를 부여했다. 법원은 이해관계인의 의사와 채권자의 권익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가급적이면 강제인가를 피하는 경향이 있지만 명백히 청산가치가 보장되는 회생계획 등에 대해서는 법적, 경제사회적 요소를 고려하여 강제인가를 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채권자 등의 이의제기 또한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 권리보호조항제도(‘강제인가’)의 사례 >
흔히 강제인가로 지칭되는 ‘권리보호조항 제도’는 법원이 직권을 행사하여 기업회생절차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판단을 내리고 개입하는 드문 경우에 속한다. 법원은 2002년 5월 ㈜쌍방울개발사건에서 1만여명이 넘는 채권자들이 관계인집회에 참석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들의 권리보장을 위해 ‘사전권리보호조항’을 발동해서 인가의 요건을 만들어 준 적도 있다.
2009년에는 서울회생법원(당시 서울중앙지법 제4파산부)에서 쌍용자동차의 회생계획안에 대해서 권리보호조항을 발동한 바 있다. 3차관계인집회에서 두차례나 표결하는 진통 끝에 ‘해외 전환사채권자’ 등의 반대로 회생계획안이 부결됐지만, 법원은 ‘강제인가’를 했다. 그 이유는 회생계획안이 적법요건을 준수했고, ‘해외전환사채권자’의 수정요청 사안이 국내법과 회사의 재정상황에 부합하지 않았고, 다수의 채권자와 주주가 회생계획안을 찬성했고, 회사의 채권변제율이 청산시의 채권배당률보다 훨씬 높아 회사를 존속하는 것이 이해관계인에게 유리했고(기업계속가치 > 청산가치, 청산가치보장의 원칙), 회사의 영업상황이 호전되고 있다는 점 등이었다.
여기에 쌍용차사태는 단순히 일개 기업의 존망에 관한 문제를 넘어서 평택지역의 경제사회적 충격을 가져왔고, 해고노동자들의 자살이 이어지면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회생절차를 폐지하면 대규모 실업자가 양산되고, 자동차부품업체 등 협력업체가 연쇄부도하고, 평택 등 지역경제가 위축되고, 주주 등 이해관계인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점이 위의 법적 요건과 함께 경제사회적으로 고려되었을 것이다.
법원은 2013년 5월에 한국실리콘의 회생계획안도 권리보호조항제도를 인용하여 강제인가했다. 당시 서울중앙지법(파산부) 재판부는 관계인집회에서 회생계획안이 부결되자 “계속기업가치가 청산가치를 웃돌고 회생계획안의 수행 가능성이 높다"면서 인가를 결정했다.
당시 법원은 한국실리콘의 청산가치는 2천억원이지만 계속기업가치는 훨씬 많은 5천억원으로 보았다. 회생계획안에서는 회생담보권자는 채권전액을 2023년까지 현금으로 분할변제받고, 회생채권자는 채권의 68%를 2023년까지 현금으로 분할변제받고 나머지는 출자전환하는 것이었는데, 한 개의 조에서 법정 동의가 이뤄지지 못하면서 결의안이 부결됐다. 그러나 법원은 나머지 한 개의 조에서 법정 동의요건이 충족된 점을 근거로 하여 권리보호조항을 발동하고 계속기업가치가 청산가치보다 훨씬 높다는 점을 제시하여 회생계획안을 강제인가한 것이다. |
<기업회생 이론 및 실무>(홍인섭 저)에서는 ‘강제인가’를 기업회생절차에 규정된 ‘권리보호조항 제도’라는 점과 그 입법취지를 보다 분명하게 강조했다. 즉 (변경)회생계획안에 동의하지 않는 조(組)가 있더라도, 법적 요건을 충족하는 정당한 근거를 갖고 기업회생을 추진하는 회사와 이에 동의하는 조(組)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법무법인 태승 '기업회생 및 파산 센터장' 홍인섭 변호사/02-525-5400)
홍인섭 변호사는 여기서 '법원에서 권리보호조항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개의 조에서 가결이 돼야 한다'는 규정을 유의할 것을 강조한다. 모든 조에서 부결됐다면 법적으로 회생절차가 폐지된다(제286조 1항2호)는 것이다.
하 전 대표의 회사가 M&A방식에 의한 변경회생계획안이 관계인집회에서 부결됐지만, 법원에서 ‘권리보호조항 제도’(강제인가)를 발동할 수 있었던 법적 근거는 ‘담보권조 100% 동의’라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선협상대상자가 법정 청산가치(공익채권, 조세채권 등 변제이전)보다 훨씬 많은 인수가격으로 낙찰됐다는 점도 법원의 판단에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반전을 만든 주역은 하 전 대표와 신임 대표이사 관리인, 그리고 몇 명 안되는 직원들이었다. 만약 이들이 금융권출신 CRO의 부정적 관측이나 주변의 비관적 전망을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여 관계인집회에서 회생채권자 조의 반대로 변경회생계획안이 부결될 것으로 낙담하고, 우선협상대상자로 결정된 인수자(00그룹)와 회생담보권자 조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회생M&A를 담은 '변경회생계획안'은 물거품이 됐을 것이다.
(중세 흑기사는 방패나 투구, 창 등에 자신의 소속을 밝히는 문장 및 기호 등을 검게 칠하거나 갈아 없애서 알아 볼 수 없도록 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본의 '낭인'처럼 부정적 의미로 쓰여지다가 이들이 약자를 돕거나 대의에 가세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지원군'을 뜻하는 긍정적 맥락을 갖게 됐다.)
"기댈 곳이 없다"고 한탄하던 하 대표의 회생일기에는 그러나 고비 때마다 서로 다른 '흑기사'가 등장했다. 맨 처음은 회생절차에 있는 회사의 존속에 필수적인 영업을 위한 경력직 전문인력이 입사한 것이다. 황00 부장이었다. 그 이후 신규직원 서너명이 더 들어왔다. 다음은 회사의 운영자금이 바닥이 났을 때 최우선공익채권 및 강제집행 포기각서를 쓰고 6천만원을 빌려준 처형이었다. 그 다음은 고객사에서 지체배상금(Liquidate Damage)으로 25만불을 요구했을 때 합리적인 조정에 응했던 고객사의 또다른 황00 부장이었다. 하 대표는 전생에 황씨 집안에 무언가 큰 덕을 베푼 모양이다. 그리고 나서 00그룹 대표가 인수자로 등장했고, 변경회생계획안이 관계인집회에서 부결되자 주심판사가 강제인가에 나섰다.
하 대표가 이런 결말을 예감한 것일까? 그는 회생신청 395일째 되는 날에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의 이야기를 썼다. 석달 후에 펼쳐질 고통스런 시간과 극적인 반전을 감지하지는 못했겠지만... 세일즈맨이었던 카네기가 한 노인의 집에서 목격한 커다란 그림은 쓸쓸한 해변가에 나룻배 한척과 낡아빠진 노가 나동그라져 있는 광경이었는데, 그림의 밑 부분에 이렇게 써 있었다고 한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