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하 대표는 회생계획인가 이후에도 ‘M&A 추진’에 대한 담당판사의 내락까지 험난한 여정을 계속해야 했다.
“선배와 같이 술을 한잔했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집에 오는 길에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천천히 걸어왔다. 중간에 노래방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그러나 집에 오는 길에 노래방은 없었다.”(회생계획안 인가 5일)
“아버지 산소에 들르니 비장한 생각이 들었다. 사업에 망해 마지막 결심을 앞두고 부모 산소를 찾는 사람들의 심정이 지금 내 심정일 것이다. 설악산 콘도에 3박4일 동안 아무데도 가지 않고 거의 숙소에만 있었다. 머리를 식히러 왔는데 머리가 점점 더 복잡해진다.”(회생계획 인가 15일~16일)
“대표이사의 일반회생 인가가 어려워졌다. 가다가 길이 막혀버렸다. 답답한 마음에 집에 와서 혼자 막걸리를 먹고 있으니 집사람이 뭐라고 한다. 어디가도 내가 쉴 곳은 없다.”(회생계획 인가 31일)
회생계획안이 인가되면 서광이 비칠 것으로 기대했던 하 대표가 이렇게 휘청거리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기업회생절차는 평소 경영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법적인 제약으로 정상적인 기업운영 및 결정이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선의로 회생기업에 운영자금 대여를 하려는 인척에게 도리어 불쾌감을 안겨주어야 하는 제도와 운영방식에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사방이 막히면 열린 하늘을 보라>(하민 저)에서는 중소기업 대표이사 관리인의 딜레마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처형이 우리 회사에 부족한 운영자금을 대여해주기로 했다. 차용증을 처형에게 전달해주고 법원에 제출할 공익채권으로서의 최우선 변제포기 각서를 내일까지 준비해달라고 했다. 사실 새로운 운영자금 차입에 대해서는 회생기업에서 최우선 공익채권의 지위를 부여해야 하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존 공익채권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것이 번거롭고 어려운 일이라 최우선 변제 포기 각서를 법원에서는 요구한다. 그런데 법원에서 또 약속일자에 변제를 하지 못하더라도 기업회생 중에는 강제집행을 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요구한다. 그러면 사실 일반 공익채권보다도 못한 조건이 된다. 이런 조건으로 회생기업에 운영자금을 빌려줄 일반채권자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처갓집에는 미안하다. 얼굴을 볼 낯이 없다.”
이 문제는 회생일기를 마치고 나서 다시 언급했다. “첫번째 조항(최우선 변제포기)은 실무적으로 처리하기 곤란하여 각서를 받는다고 해도, 두 번째 조항(강제집행 포기)은 다른 공익채권들과의 동등한 권리도 포기하는 것이다. 회생기업의 대표이사 관리인과 아주 친분이 있어 채권을 포기할 것을 생각하고 자금을 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각서를 쓰면서까지 회생기업에 운영자금을 대여해줄 일반채권자는 없을 것이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이렇게 차입하는 운영자금에 최우선공익채권의 지위를 부여하지 말고 각서도 받지 않는 것이 오히려 회생기업이 외부에서 차입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물론 하 대표의 주장은 법리적으로 반박될 여지가 있지만, 기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운영자금을 차입하려는 경영자의 입장에서 보면 굳이 ‘최우선변제 및 강제집행 포기’라는 말을 꺼내고 각서까지 받는 것은 ‘인지상정’에서 벗어난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조건에서도 처형은 운영자금을 대여해 주었지만, 하 대표의 우려대로 선의를 밝혔던 다른 회사로부터의 차입금은 무산됐다.
회생계획이 인가된 다음에는 법원, 관리위원, CRO(구조조정 책임자), 그리고 법무법인, 회계법인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거나 대표이사 관리인의 생각과 다른 점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관리위원은 동남아 법인이 별도 법인이므로 기업회생절차 중에는 운영자금 지원이 불가하다고 보았다. 보증회사 퇴직자가 CRO(구조조정 책임자)로 선임됐는데, 주당 4일 동안 2시간 정도 근무하기로 했다. 그는 동남아 법인을 현지 직원들에게 양도하면서 우발채무를 걱정했지만, 판사는 “회생계획안 인가 후 1개월 안에 추가로 신고되지 않은 회생채권은 권리가 소멸된다”고 하였다.
CRO는 사업분할매각도 가능하지만 복잡하기 때문에 변경회생계획안을 잘 만들어서 법원에 보고하고 채권단을 설득하는데 주력할 것을 권고했다. 그리고 나서 매각주간사를 선정하고 모든 사항을 잘 조율해서 관계인집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이사 관리인은 기업의 회생계획안 인가 후에도 여러 가지 사안에서 관리위원과 판사의 검토 및 인가를 받아야 한다. 관리인 교체에 대해서 주주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운영자금 차입에 대해서 제1채권자인 보증회사의 승인을 받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런 과정에서도 특히 하자보증계획과 프로젝트 보증보험을 발행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하 대표는 이런 독백을 남겼다.
“프로젝트를 수주했을 때 보증서 발행이 안되는데 어떻게 수주하는가? 손발을 묶어 놓고 수영을 시키는 꼴이다. 손발을 풀어 놓아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손발을 풀려면 다른 주인을 만나더라도 M&A를 통해서 기업회생을 빨리 종결해야 한다.” “프로젝트를 계약하려면 회사의 신용등급이 회복돼야 한다. 영업이 다 되어 있어도 계약이 어려워진다.”
중동 프로젝트 보증서 개서에 연대보증을 하라고 하는데, 법무법인에서는 “파산 신청자가 새로운 보증을 하면 채권자에게 사기가 된다”고 경고했다(251일). 거꾸로 대표이사를 상무를 맡고 있는 사람으로 변경하는 것에 대해서는 제1채권자(보증회사)가 이의를 제기했다. 대표이사 관리인이 파산면책을 받고 회사를 떠나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하 대표는 일반회생 폐지 결정이 나자 임대차 계약서 사본, 보험증권 해지환급 증명서, 은행거래 내역서, 구청 및 동사무서 발급 개인서류 등을 개인 파산면책을 위해 제출하고, 신용불량자라는 점을 고려하여 대표이사 관리인을 사직했던 것이다. 제1채권자는 일반회생에 대해서 단호히 반대하다가 파산에 따른 대표이사 관리인 사임에 대해서 법적 근거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회사와 위임관계에 있는 이사가 파산자가 되면 위임관계가 종료된다”는 민법 690조를 제시했다.
그리고 나서 CTO(기술책임자)라는 직함으로 기업회생절차에 계속 함께하기로 했는데, 나중에 법원으로부터 매월 활동비로 5백만원씩 받고 있냐는 질의와 함께 사용내역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실제는 석달 동안 매월 1백만원 가량씩 쓰고 있었다.
<기업회생 이론 및 실무>(홍인섭 저)에서는 회생절차와 관련한 채무자 등의 위법행위에 대해서 도산범죄(형벌) 및 과태료(행정벌)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반 형법과 비교하여 도산범죄 관련 규정은 개인적 재산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규정이 아니라 총채권자의 재산상 이익을 보호하고, 형벌권을 발생시키기 위한 객관적 구성요건인 ‘회생절차개시결정(간이회생 포함)의 확정’ 또는 ‘회생계획인가결정 확정’ 등을 필요로 한다.
‘실질적 도산범죄’는 채권자 등의 실질적 불이익에 직결되는 행위를 구성요건으로 사기회생죄 등이 해당되는데, 이러한 유형의 범죄는 총채권자의 재산적 이익을 보호법익으로 하는 ‘위험범’이다. 반면에 ‘절차적 도산범죄’는 채권자의 재산적 이익의 보호를 궁극적 목적으로 하여 절차의 적정과 원활한 수행이라는 ‘국가적 법익’을 보호법익으로 하는데, 회생수뢰죄·회생증뢰죄·경영참여금지위반죄·무허가행위 등의 죄·보고와 검사거절의 죄·재산조회결과의 목적외 사용죄 등이 해당된다.
하 대표가 고객사에서 받은 ‘외상매출 채권어음할인’에 대한 허가신청서도 법원에서 반려됐다. 고객사에서 부도가 나면 회사가 대신 변제해야 하고, 변제하지 못하면 또다른 채권자를 만들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이 고객사는 신용도가 높아서 업계에서 고객사의 어음은 현금과도 같았다고 한다. 하 대표는 이 대목에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런 것은 개선돼야 한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대표이사 관리인 변경에 대해서도 주요 채권자의 동의만 있으면 된다고 하더니 갑자기 임시주주총회 의결이 필요하다고 말을 바꿨다. 그런데 임시주총을 거쳐 법원에 변경등기를 하려고 했더니 불가했다. 대표이사 사임은 주총이나 이사회 결의가 불필요하고, 법원에 ‘등기촉탁 신청’으로 대표이사 변경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등기실무상으로 보면 더 간단한 일이었는데, 결과적으로 판사와 관리위원의 엉성한 지침으로 채권자 동의, 주총 결의, 변경등기 신청을 하느라고 시간만 허비한 셈이었다.
또한 기존 조사위원(회계사)은 매각주간사로 할 수 없으므로 재선정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고객사로부터 수금이 지연돼서 직원급여의 일부가 부족해지자 사업을 하는 선배에게 급전을 빌려야 했다. 그는 자신의 일반회생절차가 폐지될 것이 확실해지자 얼마되지 않는 통장잔고를 모두 인출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다.
“담보가 있으면 담보를 처분해서 채권을 100% 회수할 수 있는 담보채권자는 (일반)회생계획을 동의하지 않는다. 국책은행은 몰라도 일반 시중은행은 잘 동의하지 않는다. 또 손해를 모두 보전할 수 있는 회생계획은 법원에서 승인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담보가 있다면 가능한 담보를 경매나 매각을 통해서 처리한 다음에 일반회생을 신청해야 한다.”
회생개시 신청 272일째 되던 날에 일반회생 폐지 및 파산신청에 따라서 아파트 경매개시 통보를 받았다. 경매종료까지 6개월 가량 걸리고 배당까지 완료돼야 면책을 받을 수 있다. 이어 306일째 되던 날에 파산관재인으로부터 ‘개인파산 선고’에 관해 법정에 출두하라는 통보를 받았고, 8일 후에 파산선고를 받았다. 기업회생절차를 밟은지 1년에 가까운 시일이 지난 것이다. 그의 위기감도 고조됐다. “시간이 갈수록 회사의 청산가치는 하락하고 나중에 청산하게 되면 채권자들에게 배당할 것이 거의 없을 것 같다.”
하 대표는 회생개시신청 328일째 되는 날에 “M&A를 진행하라”는 법원의 통지를 받았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제지를 받거나 미루어져 왔던 추진보고서를 법원에 제출한지 4주만에 답지한 것이다.
"재판 거래는 대법원만 하는가?"
< 어사출두 기다리는 춘향과 같은 심정 >
암울한 상황에서도 반전은 있었다. 고객사에서 프로젝트 수행에 전문인력이 필요하다고 상주를 요구했는데 구직자들이 회생기업을 기피하기 때문에 숙련기술자를 신규 채용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경력 20년의 황00씨가 입사를 결정했다. 이 때 하 대표는 이런 말을 남겼다. “춘향이가 어사출두 후에 죽을 심정으로 수청을 거부했는데, 알고 보니 암행어사가 이도령이었던 그 상황이다.” 황00씨에게 감사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회사는 재창업하는 회사이니 창업멤버라고 생각하고 일해 주세요.” 그러면서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이 생긴다. 회사에 나갈 기분이 생긴다”고 했다.
하자보수기간이 지난 프로젝트였지만 새로 입사한 황 부장이 전화로 조치가 이뤄지지 않자 직접 현장에 나가 처리하였고, 역시 새로 입사한 이 차장이 직전에 퇴사한 기업에서 해외 프로젝트 시운전이 그만이 할 수 있다고 하여 하 대표는 다른 회사를 위한 해외출장을 흔쾌히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자기 회사가 매출채권을 갖고 있는 협력사가 가압류로 부도위기에 처했을 때 “가압류를 하려고 하니 우리 회사가 힘들 때가 생각이 나서 망설여진다”는 말도 남겼다. 회사마다 개별적 경영논리에 의해 움직이지만 경영도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때론 이해관계를 다소 초월하는 결정과 행동이 존재할지 모른다.
반면에 하 대표가 기업회생절차에서 겪은 가장 충격적인 일의 하나는 고객사로부터 프로젝트 배상지연금(LD, Liquidated Damage) 요구를 받은 것이다. 운영자금에 시달리는 회생기업이 25만불을 되갚아야 하는 날벼락이었다.
고객사와 필사적인 협의를 통해서 8만불을 정산하고 준공유보금 50만불을 받기로 하고, 배상지연금은 고객사의 귀책사유를 설득한 보람으로 담당책임자가 사유를 자세히 파악보기로 했다. 사실상 철회한 것이다. 이로써 회사는 운영자금을 충당하고 배상지연금 부담에서 벗어나는 전화위복이 됐지만, 매출비중이 가장 컸던 프로젝트가 중도에 정리되면서 상당한 미래부가가치를 잃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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